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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CHOIR & ORGAN 소개  

 

월간 잡지 콰이어&오르간에 소개된 작곡가 최병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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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철

성공한 사람들의 과거를 살펴 보면 대부분 역경이라는 고난의 과정이 삶의 기반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된다. 진주의 화려함 뒤편에 쓰디쓴 상처의 자국이 있는 것처럼 ‘화려함’과 ‘상처’, ‘성공’과 ‘고난’등속의 상반된 단어 사이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가 성립되어 있음을 본다.

 

최병철,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역시 명성만큼이나 깊은 시련의 골짜기를 헤쳐나왔다.

“열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어요. 만 1년 정도를 마치 물건처럼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리저리 옮겨놓으면 옮겨놓은 상태 그대로 있어야 했죠. 1년이 지난 후 엄지손가락부터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정성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겁니다.”

걷는 모습에서 보통 사람들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던 기자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1936년생,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한 해를 이처럼 소아마비와의 처절한 싸움으로 지내야 했다.

그의 음악 수업은 동생의 피아노 교습을 먼발치서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사내자식이 무슨 음악이냐며 절대 안 된다는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로 그는 정식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 뒤를 몰래 쫓아가 어깨 너머로 배우는 꾀를 내었다. 각 건반의 모습을 눈여겨보고 그 건반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귀담아 들은 뒤 그는 종이로 만든 건반을 이용, 상상 속의 소리에 귀 기울여가며 피아노 연습을 했다. 수업 시간에도 서랍 속의 종이 건반을 올려놓고 피아노 연습을 할만큼 그의 피아노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한국 대표 작곡가의 성장은 이처럼 열악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소아마비를 딛고 일어서서 걷는 데 까지 꼬박 2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발목 아래로는 마비가 낫지 않아 지금까지도 발목을 당겨 구부릴 수는 없게 되었죠. 그래도 걸을 수 있다는 게 어딥니까, 더구나 걷기 시작했을 때 전쟁이 났으니 망정이지 그때까지도 낫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그의 시련은 이뿐이 아니었다. 전쟁 중에 아버지는 북으로 납치되었고, 덕분에 자신은 온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피난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 삼선교에 있던 그의 집은 폭격으로 이미 전파된 상태였다.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의 가족은 명륜동의 한 부서지지 않은 집에 들어가 무작정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주인이 찾아오기까지 10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담배 장사에서부터 구두닦이, 겨울이면 창경원 연못 앞에서 스케이트 날 가는 일까지 별별 일을 다해 보았다.   

 “당시 서울에서 스케이트 탈 수 있는 곳은 한강하고 창경원 연못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겨울이면 스케이트 날 가는 것으로 돈벌이를 했고 그외에는 양공주들을 통해 담배를 구한 뒤 이를 팔기도 했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할 수 있는 장사치고는 수입이 꽤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양공주와 거래하는 내 모습이 마땅찮으셨는지 그때부터 내게 뜨개질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뜨개질을 배웠죠. 옷은 물론 가방이며, 귀고리까지 별별 것을 다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뜨개질로 만든 옷을 보면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뜨개질에 담배 판매로 어렵게 살아가는 와중에도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계속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살던 집 근처에 홀로 남겨진 할머니 한 분이 계셨어요. 폭격에도 집이 무사했지만 식구 모두가 할머니만 남겨놓고 피난을 간 상태라 할머니는 매우 쓸쓸해하셨죠. 난리통에 모두 피난을 가는 바람에 동네엔 빈 집이 많았습니다. 10채당 한두 집 사는 정도였죠. 그 할머니께선 우리가 살던 집에 자주 놀러오셨습니다. 어느 날인가 할머니께서 쌀을 한 바가지 들고 오셨더군요. 그때까지는 불쌍한 할머니라 생각하고 오시면 식사 대접도 하고 그랬는데 알고 보니 굉장한 부잣집 할머니셨어요. 언젠가 한동안 집에 들르시질 않길래 궁금해 댁으로 찾아갔더니 편찮아 누워계시더군요. 보살펴 드리느라 몇 차례 할머니 댁을 드나들었는데 그때 할머니 댁에 피아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에 피아노를 가지고 있는 집이 어디 흔했겠어요? 웬간히 살기 전엔 어림도 없는 일이죠. 그때 할머니께 가끔 와서 피아노를 쳐도 되겠느냐고 여쭈었죠. 할머니는 허락을 하셨고 그래서 틈날 때마다 할머니 댁에서 피아노를 쳤습니다. 하지만 소아마비의 영향으로 제대로 칠 수는 없었습니다. 손가락에 힘이 없어 자꾸 뒤집혀지는 게 제대로 연주하기가 영 힘들더군요. 인정하고 싶지 않고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때 연주자로서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연주자가 아닌 작곡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작곡의 꿈을 구체화하도록 한 계기는 우연히 그리고 우습게 찾아왔다. 당시 그는 혜화동 우체국 앞에서 담배와 콩 볶은 것을 팔아 돈을 벌었다. 담배는 몰라도 볶은 콩의 경우 일정한 양씩 담아놓을 종이가 필요했는데 마침 알고 지내는 강냉이 장수 아저씨가 있어 담배를 건네주고 파지를 싸게 구입하는 것으로 상부상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그 아저씨의 리어카에 두꺼운 책이 있어 유심히 살펴보니 Jathassohn(독일)의 화성학 책이었다. 연주자로서의 길을 포기한 후 작곡가로서의 삶을 생각하던 중이라 그 책은 그의 눈에 금방 띄었다. 얼마냐 묻고 구입하려는 그에게 아저씨는 공부하려는 거라면 그냥 가져가라며 선뜻 건네주었다. 그날 이후 그는 일어(日語)로 만들어진 그 화성학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며 독학으로 화성학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이처럼 독학으로 작곡의 기초를 닦던 그에게 음악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살던 동네의 한 형이었다. 축음기와 함께 SP로 만들어진 고급 명곡 판을 다량 가지고 있던 그는 학생 최병철에게 매일 음반을 들려주었다.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 형님을 통해 정말이지 수많은 명곡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곡에 대한 설명도 얻어 들을 수 있었죠. 내게 많은 영향을 준 형님이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꿈을 저버릴 수 없었던 그는 음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이유만으로 해군 군악대에 지원 입대를 결심했다. 하지만 이미 지원이 마감되어 그는 하는 수없이 해병 군악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악기를 다를 줄 모르던 그는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피아노를 치면 있게 해주겠다고 했으나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전교생의 90%가 서울대에 합격하던 시절의 보성고 출신에다 그 중에서도 공부를 꽤 잘했기에 그는 시험 성적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수석 합격이라는 영예를 얻을 수 있었으나 정작 군악대에서 필요한 실기면에서는 내세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군에서 이론을 가르치라는 요구가 들어왔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려면 일반 사병으로는 곤란하니 장교로 입대하라는 주문을 했다. 하지만 장교가 되자면 모든 훈련을 반드시 받아야만 했고 그것은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었던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그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심재구 해병 군악대 상사에 의해 도로 집으로 보내졌다. 작고한 소프라노 김자경 씨의 시동생이기도 했던 심재구 씨는 입대 전 최병철을 혜화동 성당에서 성가대 지휘자로 데뷔시키고 이끌어준 서울 음대 성악과 정훈모 선생과의 연락을 통해 책임지고 서울대에 입학시키겠다는 답을 받아내고 그를 제대시켰다. 결국 서울대 입학 약속이라는 결과를 얻고 그는 도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서울대에 입학하기 전 그는 이미 열서너 곡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인 이순신 장군의 시 ‘한산섬’을 가사로 해 만든 곡은 당시 출판되던 월간지인 <음악>지에 당선되어 실리는 작은 성취를 맛보기도 했다.

학창 시절 그는 참으로 낭만적인(?) 생활을 했다. 뜻이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뒤 철조망 담을 몇 가닥 끊고는 개구멍을 만들어 곧잘 넘어다니곤 했다. 그 앞에서 장사를 하던 아주머니에게 까치담배 몇 개 사고 막소주 한 병을 둘러메고는 산으로 올라가 개울에 발 담그고 친구들과 어울려 철학을 논하고 시를 읊고 또 자작곡을 부르기도 했다.

 “당시엔 그게 멋이었어요. 어린 학생들이 뭘 얼마나 알겠어요. 하지만 나름대로 삶을 고뇌하고 인생을 논하고 위대한 철학가의 사상이 어떠느니, 누구의 시가 어떠느니 등을 나누며 어렴풋이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를 깨달아갔죠.”

 보성고 재학 시절 그는 수학에 큰 재능을 보였다. 당연히 대부분의 선생들은 그가 수학과나 물리학과에 진학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졸업과 함께 그는 약속대로 서울 음대 작곡과에 지원했고 덕분에 진로를 두고 선생님과 많은 마찰도 겪었다.

 어쨌든 서울 음대 작곡과에 합격한 그는 보성고 출신 제1호 음대생이 되었다.

 입학 후 지도 교수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는 로마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이문근 신부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는 평생의 자양분을 얻었다.

 “1학년 때였습니다. 나는 열심히 대위법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다른 선생님에게서 수업을 듣던 동기생들은 대위법은 이미 끝냈다며 너는 아직도 대위법을 공부하느냐고 묻는 거에요. 그러면서 자신들은 ‘베토벤의 작풍은 어떻다, 브람스의 스타일은 어떻다, 이번엔 누구누구의 스타일로 작품을 한번 만들어봐야겠다’ 등 나와는 동떨어진, 이미 저 앞에서 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나는 이거 큰일났구나, 빨리 열심히 공부해야 저 친구들을 따라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2학년 때였습니다. 그때 난 푸가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친구들은 자신들은 푸가를 이미 끝냈다며 너는 왜 그리 늦느냐고 핀잔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에 정말이지 난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동기 중 실력이 제일 뛰어나다는 친구의 작품 노트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대위의 구성이나 푸가의 형성이 엉성하더군요. 그날 이후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지금 내가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는 이문근 신부를 통해 음악의 기초를 매우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다. 산타체칠리아에서 작곡과 오르간을 공부하고 교황청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던 그였기에 최병철에게 그의 가르침은 하나하나 피와 살이 되었다. 손수 나무를 깎고 파이프를 만들어 오르간을 제작하기도 했던 이문근 신부는 결코 웃는 법이 없는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최병철은 2학년 8성 대위법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그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그가 제출한 숙제를 보고 이문근 신부가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탄탄한 작곡 능력은 제1회 동아 콩쿠르 작곡 부문에서 우승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음대 졸업 후 그는 제물포 고등학교에 음악 선생으로 취직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모교인 보성 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동시에 명지 대학의 전신이었던 물리 사범대학에서 시간강사로도 활동을 했다. 하지만 1961년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며 군미필자의 경우 교사직을 할 수 없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그는 보성고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잘 걷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육군에 입대했고 정밀 신체 검사 결과 발목을 구부릴 수 없는 플랫토(flat toe)라는 판정을 받아 다시금 제대하고 말았다.

대학 시간강사로 밖에 활동할 수 없었던 그에게 교사의 길을 열어준 곳은 성심 여고였다. 외국 수녀들에 의해 설립된 성심 여고는 당시 학생 모두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시설도 뛰어난 좋은 학교였다. 성심 여고 교장이었던 수녀가 학생을 시켜 크리스마스 합창 공연을 위해 와서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내게 했고 최병철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 후 크리스마스 합창 연주만을 위해 출근하는 조건으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공연이 끝난 후 학생들은 물론 학교측도 그의 교사 영입을 적극 추진했고, 결국 문교부의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수녀원에서 채용하는 방법의 편법을 통해 성심 여고 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박정희의 맏딸인 박근혜가 성심 여중에 입학하면서 그는 어떨결에 정식 교사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1964년 성심 여고 재단은 대학을 설립하기로 하고 성심 여대를 설립했다. 음대 교수로 채용할 만한 인물을 추천하라는 학교측의 요구에 몇 명을 추천했지만 학교측에서는 그들의 이력서를 검토한 후 며칠 뒤 당신을 채용할 테니 당신이 음대 교수직을 맡아 달라는 기대 밖의 전갈을 보내왔다.

 이로써 그는 성심여대 창설 멤버로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67년 학교측에서는 그에게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오라며 유학을 보내줘 미시간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이문근 신부의 가르침은 빛을 발했다. 입학 시험에서 그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3성 대위의 청음 시험을 치렀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쌓아온 합창 지휘 경험과 대학에서 이문근 신부를 통해 배운 가르침 덕에 그는 어렵지 않게 받아 적을 수 있었다. 더구나 한참 받아 적고 있는 도중 시험감독은 그 정도면 됐다며 그만해도 된다고 말했고, 화성학 시험 역시 끝까지 풀지 않았는데도 그만하며 됐다며 합격시켰다.

 “이문근 신부님의 철저한 기초실력 다지기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대학의 대부분 작곡과에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대위, 푸가 등을 소홀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본이 충실하지 않으면 자신의 오리지낼리티를 드러내기 힘듭니다. 기본이 부실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현대음악을 한다 해도 사상누각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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